법정스님과의 추억

1982년 여름 어느 날이었다. 대학 3학년 1학기가 끝난 직후였다.
TV에선 간밤에 장대비가 쏟아져 수해가 발생했다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나는 그날 전남 순천시의 천년고찰 송광사 인근의 한 민박에서 아침을 맞았다.
아침 식사를 마치자마자 찾아간 곳은 송광사에서 1.5km 가량 떨어진 불일암. 법정스님이 홀로 생활하신다는 그 암자다.
잡지 '샘터'에 연재된 법정스님의 글에 매료되어 언젠가 한번쯤 뵙고 싶었던 마음이 간절했었다. 그래서 여름방학을 이용해 용기를 내어 1박2일 일정으로 불일암을 찾아간 것이다.
나중에 알았지만, 스님은 자신의 글을 '샘터'에 1975년 9월호부터 2008년 7월호까지 총 394회 연재했다. 이는 한국 월간 잡지 역사상 최장기 연재 기록이라고 한다.
질퍽거리는 산길을 오를 때는 다행히 비가 내리지 않았다. 불일암 가까이 갔을 때는 주변 언덕에 신이대가 많이 심어진 것으로 기억한다.
암자 주변의 사위는 조용했다. 숨소리를 내는 것조차 죄를 짓는 것같았다. 헛기침으로 인기척을 내는 것은 더욱 불경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님, 계십니까'란 말이 머리 속에서만 맴돌고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 말이 나오지 않은 게 아니라 감히 못 꺼낸 것이다.
불일암의 첫 인상은 내겐 이처럼 근엄했다. 속인(俗人)을 압도하는 묘한 분위기가 있었다.
소박한 건물은 3채로 기억한다. 입구에서 가장 멀리 있는 본채는 스님이 공부하고 주무시는 곳이다. 입구에서 가까운 건물은 광(창고)과 부엌 공간이다. 입구에서 본채를 바라볼 때 오른쪽에 있는 가장 작은 건물이 해우소(화장실)다. 해우소 옆에는 작은 텃밭이 있었다.
스님을 부를 용기가 없다고 해서 발길을 돌릴 수는 없었다. 순간, 광(나중에 알았지만) 의 문이 조금 열려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안에 무엇이 있을까 하는 호기심에 자연스레 발길이 그쪽으로 향했다.
광 안에는 수많은 책, 과학 분야 책도 있었다. 일부는 책꽂이에 꽂힌 것처럼 정리돼 있고, 일부는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스님이 읽으신 책들은 광에 있다가 어딘가로 보내진다고 했다.
책의 제목을 일별하면서 '스님은 다양한 책을 읽으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 즈음,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스님이 본채에서 나오고 계신 것이다.
'난 꼼짝 없이 도둑 신세가 돼 버렸구나.' 는 불길한 생각이 전광석화처럼 뇌리를 스쳤다.
어찌해야 하나 안절부절 못하고 있을 그때,
"광 문이 왜 이렇게 열려 있어" 혼잣말을 하시면서 스님이 광 안으로 들어오시는 거 아닌가.
당황하던 나는 "책이 많이 있어서 구경..."이라고 얼버무렸던 것 같다.
"광에는 쥐새끼나 들어가지 왜 사람이 있어"
스님은 내 말을 끊으며 이렇게 호통을 치셨지만, 다행히도 눈빛은 나를 절도 피의자로까지는 보지 않으신 듯했다.
나와 법정스님의 첫 대면은 이처럼 다소 희비극적 장면으로 시작됐다.
스님은 당시 '하안거(夏安居)' 중이었다.
하안거는 승려들이 여름철 석 달 동안 한곳에 머물며 수행하는 전통이다. 석가모니 부처 생존 당시 인도에서 생명을 해치지 않기 위해 외출을 삼가고 수행에만 전념했던 관습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스님은 낮 12시가 되자 점심을 드시러 본채 밖으로 나오신 것이었다.
"학생인가"
"네, OO대학교 O학과 3학년입니다."
그러자 회초리같은 스님의 질책이 이어졌다.
"왜 학생이 날도 궂은데 공부는 안하고 돌아다니나."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용기를 내 답변했다.
"스님을 한번 뵙고 싶어서 왔습니다."
"......"
스님의 침묵 후에 또 질책이 쏟아질까 겁 났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의 나는 수줍은 백면서생이었다.
"스님을 한번 뵈었으니 이제 가보겠습니다."
그런데, 스님은 예상 외로 굳은 인상을 풀고 이렇게 말씀했다.
"기왕에 왔으니 밥이나 먹고 가."
스님이 손수 씻으시는 쌀에는 잡곡이 꽤 많이 섞여 있었다고 기억한다.
"제가 도와드릴까요"라고 했지만, 스님은 손사래를 치셨다.
스님은 석유 곤로를 이용해 국도 끓이셨다. 농도는 찌개와 국의 중간쯤 되어 보였다. 된장끼를 기반으로 양배추, 표고버섯, 두부를 넣어 끓인 국이다. 간은 내 입에 맞았다. 다른 반찬은 배추 김치, 오이 장아찌 등 3가지 정도였던 것 같다.
스님과의 겸상은 부엌 안에서 이뤄졌다. 스님은 나무로 직접 만든 의자를 권하셨다.
나는 당시 그것이 '빠삐용 의자'인 줄 몰랐다. "이것이 빠삐용 의자이군요"라고 말대접 해드리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스님이 속으로 '빠삐용의자인 줄도 모르는 녀석이구나' 하고 생각하셨을 거란 추측이 들자 부끄러움이 엄습해오기도 했다.
빠삐용 의자는 영화 '빠삐용'에서 주인공이 "너의 죄는 세월을 허비한 죄이다"라는 말을 듣고 깨달음을 얻는 장면에서 영감을 받아 명명됐다고 한다. 스님은 이를 통해 허송세월하지 않고 주어진 시간을 소중히 여기는 삶을 강조하고자 했다.
빠삐용 의자는 스님의 저서 '무소유'(1976년 출간)에 처음 소개된다.
식사 하면서 스님은 몇가지를 물어보셨다. 대학생활은 어떤지, 1980년 '서울의 봄'과 5·18때 죽거나 다친 친구들은 없는지, 장래 희망은 무엇인지 등의 질문이었다.
스님은 하루에 아침과 점심 두 끼만 드신다고 했다. 오래된 습관이란다. 점심 이후 다음날 이른 아침식사까지 간헐적 단식을 17시간쯤 하신 것 같다.
설거지를 도와드리겠다는 나의 제안도 스님은 거절하셨다.
설거지를 마친 다음, 스님의 질문이 이어졌다.
" '자기로부터의 혁명'이란 책을 읽어봤나."
들어본 적이 없는 책이었다.
"생소한 제목입니다."
이 책은 인도의 명상가 크리슈나무르티가 그해 펴낸 신간이었다. 심심산골에서 수행하는 스님은 그 책을 이미 읽으셨다. 서점 많은 저자 거리에서 살고 있는 나는 무안했다.
스님은 또 물었다.
"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희랍인 조르바'를 읽었나."
'니코스 카잔차키스...?' 저자의 이름마저 내겐 낯설었다.
"못 읽었습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도 1964년에 이미 개봉됐다. 앤서니 퀸이 주인공 알렉시스 조르바 역을 맡았다. 영화는 크레타 섬을 배경으로 조르바와 작가 버질의 우정을 그린 작품으로,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두 사람이 해변에서 춤추는 장면이 유명하다.
스님은 인내심을 삼킨 듯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또 물으셨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읽었겠지?"
나는 또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안 읽었기 때문이다.
"'죄와 벌'은 읽었지만, 그 책은 아직....."
스님의 눈빛은 실망감으로 그득했다. 번개가 내리치듯한 스님의 호통이 이어졌다.
"골빈당 당수가 되려고 그래?"
그때서야 스님을 괜히 찾아왔다는 후회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스님은 나를 본채로 이끄셨다.
아까 불러주신 4권의 책 제목을 적게 하셨다. 책을 읽고 독후감을 써서 보내라고 하신다. 원래 4권이었지만, 한 권은 기억나지 않는다.
스님과의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이었던 그날의 파노라마는 이렇게 마감된다. The End.
결국 독후감은 스님께 보내지 못했다. 이후 얼마 되지 않아 군입대를 해야 했다는 게 핑계라면 핑계이다.
하지만, 스님이 불러주신 책 4권은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해서 모두 읽었다. 안 하면 안 될 숙제로 여겨져서다. 최소한 골빈당 당수는 되고 싶지 않았다.
이후 스님이 발간하신 책을 대부분 읽었다. 예전에 읽었던 '무소유'를 재독하고 '산방한담' '숫타니파타' '버리고 떠나기' '말과 침묵' '영혼의 모음'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등등.
나는 불자도 아니고 '맑고 향기롭게' 회원도 아니다. 하지만 책에 적힌 스님의 말씀은 언제나 맑고 향기롭게 들렸다.
젊은 날의 나는 그 말씀을 음미하는 것을 즐겼다. 다른 한편으로 '말로 지은 업보다 글로 지은 업이 크다'는 스님의 말씀은 죽비처럼 나를 일깨우곤 했다.
세월이 한참 흘러 2007년 스님이 중병에 걸리셨다는 뉴스를 봤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도밖에 없었다.
결국 스님은 2010년 3월 11일 서울 길상사에서 입적하셨고, 3월 13일 송광사에서 스님의 다비식이 열렸다. 법랍 55세, 세수 78세. 요즘의 의술로는 다소 아쉬운 연세에 가셨다고 할 수 있다.
이승에서의 영결이라고 할 수 있는 다비식만은 보고 싶어서 차를 몰았다. 스님을 추모하는 수많은 행렬로 인해 차량 이동이 여의치 않았지만, 가까스로 스님의 마지막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또다시 세월이 흘러 2023년 여름 전남 해남군 문내면 우수영리에 세워진 법정스님 마을 도서관을 방문했다. 법정스님의 생가터에 2022년 1월에 개관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다. 도서관 마당에는 '빠삐용 의자' 조형물도 설치돼 있었다.
당초 해남군은 법정스님의 생가터 복원을 계획했으나, 스님의 무소유 정신에 맞지 않는다는 의견을 반영해 생가 복원 대신 마을도서관을 건립했다고 한다.
요즘따라 스님 생각이 간절한 것은 그분이 '시대의 스승'이셨기 때문이다. 김수환 추기경도 그런 분이지만 그 분 역시 이 세상 분이 아니다. 정치적 스승인 김대중 전 대통령도 고인이 되신 지 오래다.
이 나라가 어디로 흘러가는지... 탄식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빠삐용 의자'의 교훈처럼 허송세월하지 않고 주어진 시간을 소중히 여기고 사는 것은 보통 사람들의 소박한 희망이다. 더 간절한 것은 '민주주의의 후퇴'가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국민은 3개월 넘게 허송세월 하면서 걱정과 불안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하루빨리 비정상이 정상으로, 원래의 풍경으로 되돌아가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