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하인드 한국사 #101
영조·정조 시대 ‘탕평책’의 실제 효과와 한계
1. 탕평책의 추진 배경과 주요 정책
영조와 정조는 조선 후기 붕당(정치 파벌) 간의 극심한 대립과 정국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 탕평책(蕩平策), 즉 당파를 초월한 인재 등용과 정국 운영의 중립성을 표방했다. 영조는 탕평파를 중심으로 정국을 이끌며, 산림(사림파의 인적 기반)과 서원 등 붕당의 뿌리를 약화시키고, 이조 전랑의 후임자 천거권 등 붕당 정치의 핵심 제도를 폐지하는 등 당파의 기반 자체를 정비했다. 정조는 각 붕당의 주장을 명확히 가려 옳고 그름을 따지는 적극적 탕평책을 펼치고, 규장각 설치·초계문신제 시행 등 신진 인재를 등용하며 왕권을 강화했다. 또한 장용영 설치, 수원 화성 건설 등 군사·행정적 기반도 다졌다.

2. 탕평책의 실제 효과
- 정치적 안정과 왕권 강화:
영조·정조 시기 탕평책은 당파 싸움을 크게 줄이고 조정 내 갈등을 완화해, 국정 운영의 안정성을 높였다. 왕권이 강화되면서 중앙집권 체제가 확립되고, 왕이 정국 운영의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 사회 개혁과 민생 안정:
영조는 균역법 시행, 형벌 완화, 법전 정비 등 민생 안정과 제도 개혁을 추진했고, 정조는 신해통공 등 경제 정책과 규장각을 통한 학문·문화 진흥으로 문화적 번영을 이끌었다. - 붕당 체제의 약화와 인사 개혁:
붕당의 정치적 의미가 약해지고, 인재 등용의 폭이 넓어졌다. 탕평파가 정국을 주도하며, 당파를 초월한 인재 기용이 이루어졌다.
3. 탕평책의 한계와 문제점
- 붕당 폐단의 근본적 해결 실패:
탕평책은 강력한 왕권으로 당파 간 다툼을 일시적으로 억누른 것이었으며, 붕당 정치의 구조적 문제를 완전히 해소하지 못했다. 영조·정조 사후 탕평정치는 곧바로 무너졌고, 파벌 갈등이 재연되었다. - 제도화·규범화의 미비:
탕평정치는 영조·정조라는 ‘명군’의 개인적 역량에 의존했을 뿐, 제도적·규범적으로 뿌리내리지 못했다. 왕권 약화 시 곧바로 붕당 정치가 복원되는 구조적 한계가 있었다. - 사회 구조적 모순의 지속:
탕평책은 지배층 내부의 안정과 결속에는 기여했으나, 농민 등 기층 사회의 불만과 사회경제적 모순을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했다. 18세기 사회경제적 변동, 계층 간 갈등 등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 정치적 목적의 한계:
탕평책은 왕권 강화를 위한 방편적 성격이 강했고, 당파 간의 갈등을 근본적으로 해소하기보다는 정국의 안정을 위한 임시적 조치에 머물렀다.
결론
영조·정조의 탕평책은
- 당파 싸움 완화, 정치 안정, 왕권 강화, 사회 개혁 등의 긍정적 효과를 가져왔으나,
- 붕당 폐단의 근본적 해결, 제도적 정착, 사회 구조적 모순 해소에는 한계가 있었다.
결국 탕평책은 일시적 안정과 왕권 강화에는 성공했으나, 장기적이고 구조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참고문헌
- 우리역사넷, 「영조와 정조의 탕평 정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탕평파」
- 국사편찬위원회, 「탕평책」
- redhood-bluehood.tistory.com, 「조선의 탕평정치 – 사회적 안정을 위한 노력과 그 평가」
- 아하, 「정조시대 탕평책의 한계는 무엇이었나요?」
'🏛 역사 톺아보기(한국사 공부방) > 🕰️ 비하인드 한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비하인드 한국사 #103 : 조선 후기 ‘동학’ 창시와 민중운동의 뒷이야기 (0) | 2025.06.09 |
---|---|
비하인드 한국사 #102 : 조선 후기 ‘노비 해방’의 진짜 이유 (0) | 2025.06.09 |
비하인드 한국사 #100 : 조선 중기 ‘서원’ 설립 경쟁과 폐단 (0) | 2025.06.07 |
비하인드 한국사 #99 :조선 중기 ‘문신’과 ‘무신’ 갈등의 실제 사례 (0) | 2025.06.07 |
비하인드 한국사 #98 : 조선시대 ‘사대부’의 결혼 풍습과 혼례 비화 (0) | 2025.06.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