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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톺아보기(한국사 공부방) 348

비하인드 한국사 #108 : 조선 후기 ‘의녀’의 실제 역할과 사회적 지위

비하인드 한국사 #108조선 후기 ‘의녀’의 실제 역할과 사회적 지위의녀, 조선 여성 전문직의 상징조선 후기, 엄격한 유교적 남녀 구분 속에서 여성 의료인의 필요성은 점차 커졌다. 남성 의원이 여성 환자를 진찰하는 것이 금기시된 사회 분위기에서, 의녀(醫女)는 국가가 직접 양성한 여성 전문 의료인으로 등장했다. 이들은 단순한 의료 보조를 넘어 궁중과 민간에서 여성 건강을 책임지는 핵심 인력이었으며, 조선 의학사와 여성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의녀의 실제 역할1. 여성 환자 진료와 궁중 의료의녀의 주된 임무는 왕비, 후궁, 공주 등 궁중 여성과 양반가 여성, 그리고 일반 여성 환자들의 진료였다. 내의원, 혜민서, 활인서 등 관청에 소속되어 출산, 부인병, 전염병 등 남성 의원이 접근하기 어려운 분야에..

비하인드 한국사 #107 : 조선 후기 ‘서얼’ 출신의 신분 상승 전략

비하인드 한국사 #107조선 후기 ‘서얼’ 출신의 신분 상승 전략서얼, 차별의 벽을 넘다조선 시대 ‘서얼’은 양반의 첩 자식(서자)과 천인 첩 자식(얼자)을 통칭하는 신분 계층이었다. 법적으로는 아버지의 신분을 따라 양반에 속했지만, 실제로는 중인과 같은 대우를 받으며 문과 응시 제한, 상속 차별, 제사·입양 배제 등 심각한 사회적 차별에 시달렸다. 서얼은 출생부터 사회적 한계에 갇혀 있었으나, 조선 후기로 갈수록 신분제의 동요와 사회 변화 속에서 다양한 신분 상승 전략을 모색했다.서얼 차별의 현실과 변화의 조짐서얼은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어도 첩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관직 진출과 사회활동에 큰 제약을 받았다. 문과(科擧) 응시가 금지되었고, 무과(武科)나 기술직, 실무직에만 제한적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상..

비하인드 한국사 #106 : 조선 후기 ‘상평통보’ 유통과 화폐 경제의 문제점

비하인드 한국사 #106조선 후기 ‘상평통보’ 유통과 화폐 경제의 문제점상평통보, 조선 후기 화폐경제의 시작1678년(숙종 4년), 조선은 본격적으로 금속 화폐인 상평통보(常平通寶)를 발행하며 동전 유통의 시대를 열었다. 이전에도 조선통보 등 화폐가 시도된 적이 있었으나, 상평통보는 국가가 법정화폐로 지정하고 전국적으로 유통을 강제한 최초의 주화였다. 상평통보의 등장은 농업 중심 사회에서 상업과 시장경제가 성장하던 조선 후기 변화의 상징이었다.상평통보의 유통 방식과 확산상평통보는 처음 서울과 평안도 등 일부 지역에서 유통을 시작해 점차 전국으로 확대됐다. 국가는 세금을 돈으로 내게 하는 금납화 정책을 추진했고, 시전 상인들에게 동전을 무이자로 빌려주는 등 화폐 사용을 장려했다. 발행은 호조, 상평청, 진..

비하인드 한국사 #105: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와 숨겨진 순교자들

비하인드 한국사 #105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와 숨겨진 순교자들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의 서막18세기 말부터 19세기 후반까지 조선 사회는 격변의 시기를 맞았다. 새로운 사상과 종교가 전래되며 전통 질서가 흔들렸고, 그 중심에는 천주교(가톨릭)의 확산과 이에 대한 극심한 박해가 있었다. 조선의 천주교 박해는 단순한 종교 탄압을 넘어, 사회 구조와 권력, 민중의 삶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천주교 박해의 배경: 왜 조선은 천주교를 두려워했나?1. 유교 질서와의 충돌 조선 사회의 근간은 유교였다. 천주교의 평등사상과 조상 제사 거부는 유교적 신분질서와 충효관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양반과 상민, 남녀의 차별을 부정하는 교리는 당시 지배층에게 위협으로 다가왔다.2. 정치적 불안과 권력 유지천주교 박해는 종종 정..

비하인드 한국사 #104 : 조선 후기 ‘세도정치’와 민중의 삶

비하인드 한국사 #104조선 후기 ‘세도정치’와 민중의 삶세도정치란 무엇인가?조선 후기, 왕권이 약화되고 특정 외척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는 정치 현상을 ‘세도정치(勢道政治)’라 부른다. 이는 단순히 한때의 우연한 현상이 아니라, 조선 후기 사회의 모순이 누적되어 나타난 시대적 흐름이었다. 세도정치는 1800년 순조 즉위 이후 헌종, 철종에 이르기까지 약 60여 년간 지속되었으며,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등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은 유력 가문들이 정권을 장악했다.세도정치의 전개와 특징1. 외척 가문의 권력 독점 세도정치의 핵심은 왕실 외척, 즉 왕비의 집안이 실질적인 정치를 주도했다는 점이다. 순조 때 김조순(안동 김씨), 헌종 때 조만영(풍양 조씨), 철종 때 김좌근(안동 김씨) 등 특정 가문이 국정의 ..

비하인드 한국사 #103 : 조선 후기 ‘동학’ 창시와 민중운동의 뒷이야기

비하인드 한국사 #103조선 후기 ‘동학’ 창시와 민중운동의 뒷이야기동학, 조선 후기를 흔든 민중의 종교19세기 중엽, 조선 사회는 극심한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정치의 문란, 관리의 부패, 신분제의 붕괴, 그리고 외세의 침입 위기까지 겹치며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졌다. 바로 이 시기, 한 몰락 양반 출신의 구도자 최제우가 새로운 사상과 종교를 창시했다. 이것이 바로 ‘동학’이다.동학의 탄생: 시대의 절박한 요구동학은 1860년(철종 11년), 경주 출신의 최제우가 도(道)를 깨치면서 시작되었다. 최제우는 1824년 태어나 전국을 유랑하며 조선 사회의 혼란과 백성들의 고통을 직접 목격했다. 그는 세상 인심이 각박해진 원인이 천명(天命)을 따르지 않기 때문임을 깨닫고, 새로운 구원과 개혁의 길을 모색했다. ..

비하인드 한국사 #102 : 조선 후기 ‘노비 해방’의 진짜 이유

비하인드 한국사 #102조선 후기 ‘노비 해방’의 진짜 이유조선 후기, 신분제의 균열과 노비 해방의 서막조선 사회를 이해하는 데 있어 ‘노비제’만큼 상징적인 제도도 드물다. 19세기까지 이어진 조선의 노비제는 같은 민족을 세습적으로 예속시킨 독특한 제도였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오랜 세월 이어진 이 신분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 중심에는 바로 ‘노비 해방’이 있었다. 그렇다면 조선 후기 노비 해방의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노비제의 붕괴, 단순한 인권의 문제가 아니었다노비 해방을 단순히 인권의 진보로만 보는 시각도 있지만, 실제 조선 후기의 변화는 훨씬 복합적이었다. 무엇보다 경제적·사회적 변화와 국가 재정의 위기가 핵심 동인이었다.1. 신분제의 동요와 사회적 변화18세기 이후 조선 사회는 양..

비하인드 한국사 #101 : 영조·정조 시대 ‘탕평책’의 실제 효과와 한계

비하인드 한국사 #101영조·정조 시대 ‘탕평책’의 실제 효과와 한계1. 탕평책의 추진 배경과 주요 정책영조와 정조는 조선 후기 붕당(정치 파벌) 간의 극심한 대립과 정국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 탕평책(蕩平策), 즉 당파를 초월한 인재 등용과 정국 운영의 중립성을 표방했다. 영조는 탕평파를 중심으로 정국을 이끌며, 산림(사림파의 인적 기반)과 서원 등 붕당의 뿌리를 약화시키고, 이조 전랑의 후임자 천거권 등 붕당 정치의 핵심 제도를 폐지하는 등 당파의 기반 자체를 정비했다. 정조는 각 붕당의 주장을 명확히 가려 옳고 그름을 따지는 적극적 탕평책을 펼치고, 규장각 설치·초계문신제 시행 등 신진 인재를 등용하며 왕권을 강화했다. 또한 장용영 설치, 수원 화성 건설 등 군사·행정적 기반도 다졌다.2. 탕평책의 ..

비하인드 한국사 #100 : 조선 중기 ‘서원’ 설립 경쟁과 폐단

비하인드 한국사 #100조선 중기 ‘서원’ 설립 경쟁과 폐단1. 서원의 등장과 확산조선 최초의 서원은 1543년 중종 때 풍기군수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 서원(후에 이황의 건의로 ‘소수서원’으로 사액)이다. 서원은 본래 성리학자 등 선현을 제사하고, 지역 인재를 교육하는 사립 교육기관이자 향촌 사회의 도덕적 구심점으로 출발했다. 왕이 직접 현판을 내린 ‘사액 서원’은 국가로부터 토지, 서적, 노비, 세금 및 군역 면제 등 다양한 특권을 받았다.2. 설립 경쟁과 지역 사림의 세력 다툼16세기 이후 사림파가 득세하면서 서원 설립이 급증했다. 임진왜란 이후 18세기에는 700여 개, 고종 때는 1,000개에 달할 정도였다.각 지방의 사족(양반)들은 자신이 속한 학파와 가문의 위상을 높이고, 지역 내 영향력을 강..

비하인드 한국사 #99 :조선 중기 ‘문신’과 ‘무신’ 갈등의 실제 사례

비하인드 한국사 #99조선 중기 ‘문신’과 ‘무신’ 갈등의 실제 사례1. 문신과 무신의 구조적 대립조선 중기에도 고려시대와 유사하게 문신(문관)과 무신(무관) 간의 뿌리 깊은 갈등이 존재했다. 조선은 유교적 통치 이념에 따라 문치(文治)를 중시했고, 무신은 문신에 비해 사회적·정치적 지위가 낮았다. 이는 관직 임명, 승진, 토지 분배, 연회 등 다양한 영역에서 차별과 불만을 불러일으켰다.2. 실제 갈등 사례와 사건토지 분배와 관직 차별무신들은 토지 지급이나 관직 임명에서 문신에 비해 불이익을 받았다. 이러한 차별은 이미 고려시대부터 누적되어 왔으며, 1014년(현종 5)에는 토지 지급 문제로 상장군 김훈, 최질 등 무신이 정변을 일으켜 일시적으로 정권을 장악한 전례가 있었다. 조선 중기에도 군공을 세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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