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이야기와
마음 속 꽃이 함께 피는 공간

🏛 역사 톺아보기(한국사 공부방) 348

비하인드 한국사 #88 : 조선시대 ‘사간원’과 언론의 자유 논쟁

비하인드 한국사 #88조선시대 ‘사간원’과 언론의 자유 논쟁1. 사간원, 조선의 ‘언론 기관’이자 권력 감시자사간원(司諫院)은 조선시대 왕과 신하를 대상으로 간쟁(諫諍)과 논박(論駁)을 전담한 관청으로, 오늘날의 언론·감시·비판 기능을 담당한 핵심 기관이었다. 왕의 잘못된 결정이나 비윤리적 행위, 신하들의 부정과 비리를 직언과 탄핵을 통해 바로잡는 역할을 했다. 사간원은 사헌부, 홍문관과 함께 ‘삼사(三司)’로 불리며, 그중에서도 왕에게 직접 간언하는 언론 기관의 상징적 존재였다.2. 사간원의 기능과 ‘언론의 자유’ 실체직언과 간쟁: 사간원 관원들은 왕에게 직접 잘못을 지적하거나 정책을 비판하는 ‘직간’, 우회적으로 풍자하는 ‘풍간’, 목숨을 건 ‘함간’ 등 다양한 방식으로 의견을 개진했다. 임금의 노여..

비하인드 한국사 #87 : 조선 초기 ‘사화’(무오·갑자·기묘·을사사화) 피해자들의 뒷이야기

비하인드 한국사 #87조선 초기 ‘사화’(무오·갑자·기묘·을사사화) 피해자들의 뒷이야기1. 사화란 무엇인가조선 전기 ‘사화’란, 선비(사림)들이 정치적 반대파에 의해 대규모로 화를 입은 사건을 말한다. 대표적으로 무오사화(1498), 갑자사화(1504), 기묘사화(1519), 을사사화(1545)가 있으며, 이 네 차례의 사화로 수많은 사림이 처형, 유배, 파직 등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사화는 훈구파와 사림파, 외척 세력 간의 권력 투쟁과 왕권 강화, 개혁 저항 등 복합적 요인에서 비롯됐다.2. 무오사화(1498) – 영남 사림의 몰락과 유배지의 삶무오사화는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이 사초에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판하는 글(조의제문)을 실었다는 이유로 훈구파의 공격을 받아 시작됐다. 52명이 처벌되고, 그 ..

비하인드 한국사 #86 : 세조의 왕위 찬탈 후 ‘사육신’의 실제 최후

비하인드 한국사 #86세조의 왕위 찬탈 후 ‘사육신’의 실제 최후1. 세조의 왕위 찬탈과 단종복위 운동1455년, 수양대군(세조)은 어린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조선의 7대 왕위에 올랐다. 세조의 즉위는 계유정난으로 시작된 피의 권력투쟁의 절정이었고, 이에 분개한 집현전 학사들과 충신들은 단종 복위를 위한 거사를 모의했다. 이 운동의 중심에 박팽년, 성삼문,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 등 이른바 ‘사육신’이 있었다.2. 거사 실패와 체포, 참혹한 고문1456년, 사육신과 동지들은 명나라 사신 환송연에서 세조를 처단하려 했으나, 동료 김질의 밀고로 계획이 사전에 발각됐다. 세조는 직접 이들을 심문하며 극심한 고문과 회유를 반복했다.성삼문은 달군 쇠로 다리를 꿰고 팔을 자르는 등 잔혹한 형벌에도 굴복하지..

비하인드 한국사 #85 : 세종대왕의 음악 혁신과 악학궤범 비화

비하인드 한국사 #85세종대왕의 음악 혁신과 악학궤범 비화1. 세종대왕, 음악으로 나라를 다스리다세종대왕은 한글 창제와 과학기술 발전 못지않게 음악 개혁에도 깊은 열정을 쏟았습니다. 그는 음악이 백성을 교화하고 나라의 기틀을 다지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고 믿었고, 직접 음률을 연구하며 악기 제작과 악보 편찬, 새로운 곡 창작까지 진두지휘했습니다. 세종은 한글을 통해 음악 가사와 이론을 기록·보급함으로써 음악의 대중화와 문화적 저변 확대에 결정적 기여를 했습니다.2. 음악 혁신의 구체적 성과아악과 향악의 정비세종은 중국에서 들여온 아악(유교적 의례음악)을 직접 손질해 수백 곡의 아악을 정비했고, 조선 고유의 향악(토속 음악)도 창제해 체계를 잡았습니다. 이를 통해 조선만의 독자적 음악 문화를 확립했습니다.악..

비하인드 한국사 #84 : 태종 이방원의 ‘왕자의 난’과 형제 간 비극

비하인드 한국사 #84태종 이방원의 ‘왕자의 난’과 형제 간 비극1. 조선 왕조 초기, 권력의 불안과 갈등의 서막조선이 건국된 후, 태조 이성계의 아들들 사이에는 왕위 계승과 권력 분배를 둘러싼 긴장과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태조는 계비 강씨 소생의 막내아들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했으나, 이는 신의왕후 한씨 소생의 장성한 아들들, 특히 다섯째 이방원(훗날 태종)의 불만을 불러일으켰다.이방원은 조선 건국의 실질적 공신임에도 불구하고 권력에서 소외되고, 개국공신 명단에서도 제외되었다. 정도전을 중심으로 한 신진 관료 세력은 왕자들의 사병을 혁파하고, 왕실 내 계비 소생 왕자들의 입지를 강화하려 했다. 이로 인해 왕자와 신권, 그리고 후궁 자손과 적자 간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다.2. 제1차 왕자의 난(1398..

비하인드 한국사 #83 : 조선 개국 후 고려 왕족의 운명

비하인드 한국사 #83조선 개국 후 고려 왕족의 운명1. 조선 건국과 고려 왕족의 몰락1392년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면서 475년간 이어진 고려 왕조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새로운 왕조의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해 조선은 고려 왕족과 잔존 세력에 대해 강도 높은 숙청과 탄압을 단행했다.공양왕과 왕씨 일가는 조선 건국 직후 강원도 삼척 등지로 유배되었고, 1394년(태조 3)에는 왕씨 일족을 제거하라는 신료들의 청에 따라 공양왕과 두 아들이 처형되었다. 이로써 고려의 마지막 왕가 혈통은 사실상 단절되었다.2. 왕씨(王氏) 성씨의 변화와 생존 전략조선 초기에는 고려 왕족뿐 아니라 왕씨 성을 가진 모든 이들이 탄압과 감시의 대상이 되었다. 많은 이들이 생존을 위해 성을 바꾸거나, 왕(王) 자에 점을 하나 더 ..

비하인드 한국사 #82 : 원나라와의 혼인 외교, 왕비들의 실제 생활

비하인드 한국사 #82원나라와의 혼인 외교, 왕비들의 실제 생활1. 원나라와의 혼인 외교, 그 배경과 구조고려는 충렬왕부터 공민왕에 이르기까지 약 80여 년간 원나라 황실과의 혼인 외교를 적극적으로 펼쳤다. 충렬왕은 세자 시절 원나라에 머물며 쿠빌라이 칸의 딸인 제국대장공주와 혼인했고, 이후 고려로 돌아와 왕위에 올랐다. 이 시기 고려 왕실은 원 황실의 사위, 즉 ‘부마국’의 지위를 얻게 되어 왕권을 일정 부분 강화하는 효과도 누렸다. 실제로 고려는 원 황실의 공주 8명을 왕비로 맞이했으며, 이들은 지배국 공주로서 매우 높은 위상을 가졌다. 왕실뿐 아니라 고위 관료들도 출세를 위해 원나라 공주를 따라온 몽골인(겁령구)과 혼인을 맺는 일이 잦았다.2. 원나라 왕비들의 실제 생활과 궁중의 긴장원나라 출신 왕..

비하인드 한국사 #81 : 고려시대 ‘여성 상속권’의 변화와 논란

비하인드 한국사 #81고려시대 ‘여성 상속권’의 변화와 논란1. 고려시대 여성의 상속권과 사회적 지위고려시대 여성은 동아시아 전근대 사회 중에서도 상대적으로 높은 지위와 경제적 권리를 누렸다는 평가를 받는다.여성은 결혼 후에도 친정과의 관계를 유지했고, 남편의 집이 아닌 친정에서 오랜 기간 머무르는 경우가 많았다.여성 호주(戶主) 제도가 존재해, 남편이 사망하면 부인이 집안의 호주가 되어 가계를 이끌기도 했다.족보에도 아들과 딸을 구분하지 않고 출생 순서대로 기록했으며, 사위와 외손도 족보에 올려 외가와의 관계도 중시했다.여성은 혼인, 이혼, 재혼에 있어서도 비교적 자유로웠고, 재가(再嫁)와 삼가(三嫁)가 허용되었다. 2. 상속 관행과 여성의 경제권고려시대 상속은 기본적으로 자녀 균분 상속이 관행이었다...

비하인드 한국사 #80 : 고려 말 ‘홍건적’ 침입의 실제 피해

비하인드 한국사 #80고려 말 ‘홍건적’ 침입의 실제 피해 1. 두 차례에 걸친 대규모 침입과 전개 홍건적은 원나라 말기 중국에서 일어난 한족 농민 반란군으로, 1359년과 1361년 두 차례에 걸쳐 대규모로 고려를 침입했습니다.1차 침입(1359년): 약 4만 명의 홍건적이 압록강을 넘어 의주, 정주, 인주 등 서북 지역을 점령하고, 철주와 서경(평양)까지 함락시켰습니다. 고려는 안우 장군 등 지휘관의 분전으로 서경을 탈환하고, 홍건적을 압록강 이북으로 몰아냈습니다.2차 침입(1361년): 10만~20만 명에 달하는 대군이 삭주, 안주, 무주 등 내륙을 거쳐 개경(개성)까지 진격, 마침내 수도가 함락되었습니다. 공민왕은 남쪽으로 피난했고, 개경은 수개월간 홍건적의 점령과 약탈을 겪었습니다. 2. 인명..

비하인드 한국사 #79 : 왕건의 후궁 정책과 왕위 계승 다툼

비하인드 한국사 #79왕건의 후궁 정책과 왕위 계승 다툼1. 왕건의 혼인 정책과 후궁 제도고려 태조 왕건은 후삼국 통일과 왕조의 안정을 위해 전국 각지의 유력 호족들과 적극적으로 혼인 관계를 맺었습니다.정식 왕후 6명과 23명의 후궁, 총 29명의 부인을 두었으며, 이들 대부분은 각 지역 호족의 딸이었습니다.이 혼인 정책은 단순한 사적 관계가 아니라,호족 세력을 자신의 인척으로 편입해 반란을 방지하고호족들의 협조와 충성을 유도하는 정치적 연합의 수단이었습니다.왕건은 혼인 관계를 맺은 호족들에게 벼슬과 토지, 성씨를 하사하며 그 지위를 인정해 주었습니다. 2. 후궁 정책의 구조와 특징왕건의 부인 중 6명은 정식 왕후로, 왕후의 소생만이 공식적으로 왕위 계승권을 가졌습니다.나머지 23명의 후궁(부인)도 각기..

관련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