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하인드 한국사 #83
조선 개국 후 고려 왕족의 운명
1. 조선 건국과 고려 왕족의 몰락
1392년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면서 475년간 이어진 고려 왕조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새로운 왕조의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해 조선은 고려 왕족과 잔존 세력에 대해 강도 높은 숙청과 탄압을 단행했다.
공양왕과 왕씨 일가는 조선 건국 직후 강원도 삼척 등지로 유배되었고, 1394년(태조 3)에는 왕씨 일족을 제거하라는 신료들의 청에 따라 공양왕과 두 아들이 처형되었다. 이로써 고려의 마지막 왕가 혈통은 사실상 단절되었다.

2. 왕씨(王氏) 성씨의 변화와 생존 전략
조선 초기에는 고려 왕족뿐 아니라 왕씨 성을 가진 모든 이들이 탄압과 감시의 대상이 되었다. 많은 이들이 생존을 위해 성을 바꾸거나, 왕(王) 자에 점을 하나 더 찍어 ‘옥(玉)’으로 성씨를 바꾸는 등 신분을 감추는 사례가 이어졌다. 왕씨 성을 유지한 이들도 사회적 차별과 불신, 관직 진출의 제약을 감수해야 했다.
3. 두문동과 고려 부흥 운동
고려 멸망 후 일부 왕족과 충신, 관료들은 두문동(杜門洞) 등지에 은거하며 조선에 협조하지 않고 고려 부흥을 꿈꾸었다. 이들은 ‘두문동 72현’이라 불리며 후세에 충절의 상징으로 추앙받았으나, 실제로는 조선에 의해 철저히 배제되고 탄압받았다. 두문동 은거자 중 일부는 끝내 처형되거나, 두문동에서 불태워 죽임을 당했다는 기록도 전한다.
4. 고려 왕실의 상징, 어진(왕의 초상화)의 소각
조선은 고려 왕조의 상징성을 지우기 위해 고려 왕들의 어진(초상화)도 모두 불태워 버렸다. 태조 왕건의 어진은 아예 땅에 묻으라는 명령이 내려졌고, 이후 조선 왕조에서도 전 왕조의 흔적을 철저히 제거하는 정책이 이어졌다. 이는 새로운 왕조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한 상징적 조치였다.
5. 고려 왕족의 후예와 그 이후
조선이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일부 왕씨 후손들은 평민, 상인, 지방 향리 등으로 사회 각계에 흩어져 살아갔다. 개성 왕씨 등 일부는 성씨를 유지하며 후손을 이어갔지만, 왕실로서의 위상은 완전히 사라졌다. 왕씨 후손들은 오랜 기간 사회적 차별과 불신 속에 살아야 했고, 조선 후기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점차 일반 양민과 다름없는 신분으로 전락했다.
결론
조선 건국 후 고려 왕족은
- 처형, 유배, 성씨 변경, 사회적 차별 등
극심한 탄압과 몰락의 길을 걸었다.
왕씨 성을 유지한 후손들은 신분 상승의 기회를 박탈당했고,
왕조의 흔적은 어진 소각 등으로 철저히 지워졌다.
이러한 운명은 새 왕조의 정통성 확립과 구 왕조 부흥의 싹을 자르려는 조선의 의지가 반영된 결과였다.
참고문헌
- 우리역사넷, 「고려 왕족과 조선 초기의 탄압」
- 우리역사넷, 「고양 공양왕릉」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왕씨」
- 중앙일보, 김영수, 「조선을 만든 사람들」
- 네이버 블로그, 「조선 왕 연대기 – 조선을 뒤흔든 피할 수 없는 운명의 사건 80」
- 우리역사넷, 「조선시대의 개성 상인」
- NS타임즈, 「고려의 왕들과 조선왕의 초상화들이 전해지지 않은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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