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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하인드 한국사 #89 : 조선 초기 ‘성균관’ 학생들의 생활상

J.J.(제이제이) 2025. 6. 4. 21:44

비하인드 한국사 #89

조선 초기 ‘성균관’ 학생들의 생활상


1. 성균관 유생, 예비 관료의 특권과 현실

조선시대 성균관은 국가 최고 교육기관이자 관료 양성소로, 성리학적 이념을 내면화한 인재를 길러내는 곳이었다. 성균관 유생들은 예비 관료로서 여러 특권을 누렸지만, 현실의 생활은 이상과 달리 고달팠다. 성균관 정원은 세종 때 200명으로 늘었으나, 실제 재학생 수는 수십 명에서 한두 명에 불과한 경우도 많았다. 치열한 과거 경쟁과 관직 진출의 관문이었던 만큼, 성균관은 오늘날 대학생의 꿈과 취업난이 교차하는 공간과도 비슷했다


2. 하루 일과와 기숙사 생활

유생들은 모두 기숙사(동재·서재)에 거주하며 공부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동재에는 생원, 서재에는 진사가 거처했다. 하루 일과는 새벽부터 시작되어, 경전 독서와 강의, 토론, 각종 의례에 참여하는 등 빡빡하게 짜여 있었다.
기숙사 방은 온돌이 아닌 마루방(판방)이 대부분이었고, 난방이 부족해 겨울에는 매서운 추위를 견뎌야 했다. 환자용 온돌방이 한두 개 마련되었을 뿐, 대부분 학생들은 불편한 환경에서 생활했다. 식사는 ‘나물죽’과 ‘소금밥’에 불과할 정도로 부실해, 영양 결핍과 질병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았다.


3. 질병과 사망, 그리고 교관의 한계

성균관 학생들은 장시간 앉아 공부하다가 부종병, 풍습병(오늘날의 류머티즘·관절염) 등에 걸려 사망하는 일이 적지 않았다. 열악한 주거·식사 환경과 과도한 학업 부담이 건강을 위협했다.
또한, 성균관 교관들은 대체로 인망이 없거나 늙고 병든 이들이 많아, 학생들의 학업 열의와 만족도는 낮았다. 교관직이 한직(閑職)으로 여겨져 우수 인재가 기피하는 경향이 있었고, 심지어 교관이 아예 없는 경우도 있었다.


4. 출석과 편법, 그리고 학생 자치

성균관은 ‘원점법’(출석부에 서명해 일정 점수를 채워야 대과 응시 자격 부여) 등 강제 입학·출석 제도를 도입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부모의 병을 핑계로 입학을 미루거나, 낮은 관직을 얻어 기숙을 피하는 등 다양한 편법을 썼다. 출석부 대리 서명, 숫자 위조 등 부정행위도 있었다. 실제로 성균관은 항상 학생들로 붐비는 곳이 아니라, 집안 배경이 약한 일부 학생들만 남아 명맥을 유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5. 유생의 꿈과 현실

성균관 유생들은 관직 진출과 출세, 학문적 명예를 꿈꿨지만, 현실은 열악한 생활 환경과 치열한 경쟁, 불투명한 미래가 교차하는 고단한 일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유생들은 지방에서 서당을 열거나 향약·서원 등 자치활동에 참여하며 사림 사회의 기반을 다졌다.


참고문헌

  • 우리역사넷, 「성균관 학생의 특권」
  • 우리역사넷, 「유생의 하루 일과」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성균관」
  • 건대신문, 「조선시대 성균관 새내기 유생들의 삶과 꿈」
  • 한국교육신문, 「성균관, 그곳에 학생이 있었을까?」
  • 네이버 블로그, 「성균관 역사체험 - 학문의 과정, 일과, 유생들의 자치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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