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하인드 한국사 #65
발해의 ‘해동성국’ 별명, 실제 경제력 논란
1. ‘해동성국’ 별명의 유래
발해는 8~9세기 동아시아에서 “해동성국(海東盛國)”—즉 ‘바다 동쪽의 융성한 나라’—이라는 별명으로 불렸습니다. 이 명칭은 특히 당나라와 일본 등 주변국이 발해의 영토 확장과 정치적·경제적 번영을 높이 평가하며 붙인 것이었습니다. 발해는 고구려의 옛 땅을 대부분 회복하고, 북쪽으로 헤이룽강, 동쪽으로 연해주, 서쪽으로 요동, 남쪽으로 영흥까지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자랑했습니다.

2. 발해의 경제력, 실제로 융성했나?
1) 경제적 번영의 근거
- 영토와 인구: 발해는 5경 15부 62주라는 지방 행정 체계를 갖추고, 농경지와 인구를 확장했습니다.
- 농업과 수공업: 한반도 북부와 만주 평야의 비옥한 토지에서 곡물, 콩, 삼베, 목화 등이 생산되었고, 철기·도자기·직물 등 수공업도 발전했습니다.
- 무역: 당나라, 일본, 신라, 거란 등과 활발한 교역을 펼쳐, 각국에서 발해 사신과 상인들이 오가며 국제적 위상을 높였습니다. 일본에는 발해관(渤海館)이라는 전용 교역항이 설치될 정도였습니다.
- 도시와 문화: 상경(上京) 등 대도시와 궁궐, 불교 사찰, 주자감(국립 교육기관) 등 선진 문물이 번성했습니다.
2) ‘해동성국’ 평가에 대한 논란
- 실제 경제력의 한계: 발해는 넓은 영토에 비해 인구 밀도가 낮고, 북방 기후와 험준한 지형 탓에 농업 생산력은 한계가 있었습니다.
- 귀족 중심 경제: 중앙 귀족과 지배층이 부를 독점하는 경향이 강했고, 지방과 피지배 말갈계 주민의 생활 수준은 상대적으로 낮았습니다.
- 무역 의존성: 국제 교역이 활발했으나, 내륙의 교통망이 불편하고, 무역에 크게 의존하는 구조여서 경제 기반이 취약하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 중국 기록의 과장 가능성: ‘해동성국’이라는 별명은 외교적 수사나 중국 측의 시각이 반영된 것일 수 있으며, 실제 경제력과는 괴리가 있을 수 있습니다.
3. 종합 평가
- 발해는 동아시아에서 정치·외교적 위상과 문화적 번영을 누렸고, 당대 기준으로는 상당한 경제력과 국제적 영향력을 갖춘 국가였습니다.
- 그러나 ‘해동성국’이라는 별명이 실제 경제력 전체를 대변한다고 보기는 어렵고, 일부 과장과 외부의 평가가 섞여 있습니다.
- 발해의 경제력은 영토와 국제 교역, 문화적 성취 면에서 높이 평가받을 만하지만, 내부적으로는 지역·계층 간 격차와 한계도 분명히 존재했습니다.
4. 결론
‘해동성국’ 발해는
- 동아시아 국제 질서에서 강력한 국가로 인정받았고,
- 교역과 문화, 정치적 위상에서 융성함을 자랑했지만,
- 실제 경제력은 외부 평가와 일정 부분 괴리가 있었습니다.
이 별명은 발해의 위상과 이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지만,
구체적 경제 현실은 보다 다층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참고문헌
- 국사편찬위원회, 「발해의 성장 발해, 해동성국으로 우뚝서다」(한국사 이야기 PDF)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발해(渤海)」
- 우리역사넷, 「해동성국의 구현」
- KCI 논문, 「발해의 멸망․유민사에 대한 연구 현황과 과제」
- 네이버 블로그, 「해동성국 발해」
- 이이화, 『해동성국 발해』, 교보문고
- 동북아역사재단 및 관련 사료(삼국사기, 당서, 일본서기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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