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하인드 한국사 #67
후백제 견훤의 최후와 왕건과의 인간적 갈등
1. 후백제의 몰락과 견훤의 최후
견훤은 신라 말 혼란기에 호족 세력을 규합해 후백제를 세우고, 한때 후삼국의 패권을 다툰 영웅적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말년에 이르러 아들 신검 등 왕자들과의 갈등, 내부 분열, 외부의 왕건과의 경쟁 등으로 점차 몰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특히 신검 등 장남파와 금강 등 배다른 형제파, 그리고 이를 둘러싼 세력 간의 갈등이 격화되면서, 견훤은 결국 신검에 의해 금산사에 유폐되고 맙니다.
하지만 견훤은 탈출에 성공해 고려의 왕건에게 귀의했고, 오히려 왕건에게 후백제를 칠 것을 제안하며 마지막 전투에 직접 나섭니다.
936년 황산(연산) 전투에서 후백제가 멸망하는 모습을 지켜본 견훤은 며칠 뒤 세상을 떠났고, 그의 유언에 따라 논산 청화산에 묻혔습니다.

2. 견훤과 왕건, 인간적 갈등의 뿌리
견훤과 왕건의 갈등은 단순한 영토와 권력 다툼을 넘어, 인간적 자존심과 정치적 대의의 충돌로도 드러났습니다.
927년 견훤이 신라 경주를 공격해 경애왕을 죽이고 왕비를 겁탈하며 왕권을 교체한 사건은 왕건에게 큰 충격과 치욕이었습니다.
왕건은 신라의 구원 요청을 받고 출병했으나, 대구 팔공산 공산전투에서 신숭겸 등 최측근을 잃고 간신히 목숨만 건진 채 패배합니다.
이 사건은 두 사람 사이의 인간적 감정과 정치적 명분의 대립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견훤은 자신의 행동을 “신라를 바로잡기 위한 존왕의 대의”로 내세웠지만, 왕건은 “왕을 죽인 것은 대의를 저버린 패륜”이라며 견훤을 강하게 비난했습니다.
실제로 두 사람은 편지를 주고받으며 서로를 역사적 인물에 빗대어 비판하는 등, 정치적·도덕적 정당성을 두고 치열하게 맞섰습니다.
3. 마지막 순간의 역설과 인간적 교차
견훤은 말년에 신검 등 아들 세력에게 배신당해 유폐되었고, 탈출 후에는 평생의 적수였던 왕건에게 몸을 의탁하는 역설적인 운명을 맞았습니다.
견훤은 왕건에게 후백제 정벌을 적극 제안했고, 마지막 전투에서는 칠순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직접 전장에 나섰습니다.
후백제 멸망 후 견훤은 며칠 만에 세상을 떠났고, 왕건은 견훤의 죽음을 예우로써 기렸습니다.
4. 결론
견훤과 왕건의 갈등은
- 단순한 패권 다툼을 넘어
- 신라 왕실에 대한 명분,
- 인간적 자존심,
- 시대적 대의와 정치적 현실
이 복합적으로 얽힌 드라마였습니다.
견훤의 최후는
- 가문과 세력의 분열,
- 아들과의 비극적 갈등,
- 평생의 적수와의 역설적 연대
로 마무리되며,
후삼국 통일의 마지막 장을 장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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