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하인드 한국사 #73
고려시대 ‘노비 문서’ 위조 사건
1. 노비 신분과 문서의 중요성
고려시대 노비는 사회와 경제의 근간을 이루는 계층이었습니다. 노비의 신분은 법적으로 엄격히 규정되었고, 소유권과 상속, 매매, 속량(신분 해방) 등 모든 권리와 의무는 ‘노비 문서’에 의해 증명되었습니다.
이 문서는 노비의 이름, 나이, 출신, 소유주, 거래 내역 등이 상세히 기록된 일종의 신분증이자 재산권 증서였습니다.
특히 노비가 주인 없이 국고로 귀속되거나, 매매·상속·소송 등에서 신분을 입증해야 할 때 문서의 진위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2. 전란과 혼란, 문서 소실의 비극
고려 말기 홍건적의 침입(1361년) 등 전란으로 인해 개경의 관청에서 보관하던 노비 문서가 대거 소실되는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이로 인해 누가 노비이고, 누가 양민인지 구분이 어려워졌고, 개인 소장 문서가 유일한 신분 증명 수단이 되었습니다.
문서가 불타거나 분실된 경우, 노비 신분을 둘러싼 소송이 30년 넘게 끊이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형조(법부) 등 관청의 업무가 마비될 정도였습니다.
3. 노비 문서 위조의 실태와 폐해
문서 소실과 혼란을 틈타 노비 문서의 위조가 성행했습니다.
- 일부 양민은 노비 문서를 위조해 신분을 속이고,
- 반대로 권세가나 관리들은 가짜 문서를 만들어 양민을 노비로 삼으려 했습니다.
- 국유 노비를 사적으로 빼돌리거나, 노비를 둘러싼 소송에서 위조 문서를 제출해 소유권을 주장하는 사례도 많았습니다.
특히, 노비 문서에는 글을 모르는 노비를 위해 손 도장(수지인)이나 손 그림이 들어가 있었으나, 이마저도 쉽게 위조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위조 사건은 실제로 선의의 피해자를 양산하고, 사회적 혼란과 부정부패를 심화시켰습니다.
4. 국가의 대응과 한계
문서 위조와 소송의 난립은 국가 재정과 사회 질서를 크게 위협했습니다.
- 국가에서는 노비 송사를 전담하는 부서를 두고, 판결을 중앙에서 재검토하는 등 엄격한 절차를 마련했습니다.
- 판결의 공정성을 높이기 위해 판결문을 중앙에 보고하고, 신분 확인을 위해 다양한 증거를 요구했습니다.
- 그러나 관리들의 부정부패, 뇌물 수수, 권세가의 압력 등으로 인해 여전히 억울한 판결과 피해가 속출했습니다.
이처럼 노비 문서 위조 사건은 단순한 범죄를 넘어, 당시 신분제 사회의 모순과 국가 행정의 한계를 드러내는 대표적 사례였습니다.
5. 결론
고려시대 노비 문서 위조 사건은
- 신분과 재산을 둘러싼 첨예한 사회적 갈등,
- 전란과 행정 혼란이 불러온 법적·제도적 취약성,
- 부정부패와 권력 남용의 구조적 문제
를 집약적으로 보여줍니다.
이러한 사건들은 조선 초기까지 이어지며, 노비 신분 소송과 위조, 부정 판결 등으로 사회적 혼란을 가중시켰습니다.
결국 노비 문서의 위조와 소송은 신분제 사회의 취약성과, 국가가 신분질서와 재산권을 어떻게 관리·통제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단서입니다.
참고문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고려시대의 노비연구」
- 우리역사넷, 「노비의 신분 상승-속량」
- 네이버 블로그, 「조선왕조실록 조선시대 초기의 노비 이야기」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역사/고려시대사 분야 항목」
- 위키백과, 「한국의 노비제도」
-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 관련 사료
'🏛 역사 톺아보기(한국사 공부방) > 🕰️ 비하인드 한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비하인드 한국사 #75 : 고려시대 ‘기생’의 사회적 역할 (7) | 2025.05.31 |
---|---|
비하인드 한국사 #74 : 공민왕과 신돈의 파격적 개혁과 반발 (3) | 2025.05.31 |
비하인드 한국사 #72 : 무신정변 후 귀족들의 망명 생활 (2) | 2025.05.31 |
비하인드 한국사 #71 :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실제 의도와 실패 원인 (4) | 2025.05.31 |
비하인드 한국사 #70 ; 고려 개경의 야시장과 상업 발달 (8) | 2025.05.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