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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하인드 한국사 #74 : 공민왕과 신돈의 파격적 개혁과 반발

J.J.(제이제이) 2025. 5. 31. 05:21

 

비하인드 한국사 #74

공민왕과 신돈의 파격적 개혁과 반발


1. 원 간섭기 극복과 개혁의 시작

14세기 중반, 공민왕은 원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 고려의 자주성을 회복하고자 대대적인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대표적으로 정동행성 폐지, 쌍성총관부 공격을 통한 영토 회복, 몽골식 관제와 풍습의 철폐, 친원파 숙청, 정방(인사권 기구) 폐지 등 왕권 강화 조치가 이어졌습니다.
이러한 개혁은 신진 사대부의 성장 기반을 마련하고, 기존 권문세족의 기득권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었습니다.


2. 신돈 등용과 전민변정도감의 설치

공민왕은 기존 권문세족의 반발과 개혁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승려 출신 신돈을 파격적으로 등용했습니다.
신돈에게 토지와 신분 문제 해결을 일임하며, 1366년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을 설치했습니다.
이 관청은 권문세족이 불법적으로 차지한 토지와 노비를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고, 강제로 노비가 된 양민을 해방시키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실제로 신돈의 개혁 아래 수많은 토지가 환수되고, 억울하게 노비가 된 이들이 양민으로 신분을 회복했습니다.
당시 백성들은 신돈을 ‘성인(聖人)’이라 칭할 정도로 환영했고, 민심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3. 개혁의 성과와 한계

신돈과 공민왕의 개혁은

  • 권문세족의 경제·사회적 기반을 약화시키고,
  • 왕권을 강화하며,
  • 신진 사대부와 새로운 인재 등용의 길을 넓혔습니다.
    또한, 교육 개혁(국학 중흥), 관료 체제 정비, 순자격제(근무연한에 따른 승진) 실시 등도 함께 추진되었습니다.

그러나 개혁의 추진 세력이 미약했고, 권문세족의 조직적 저항, 관리들의 부패, 홍건적·왜구의 침입 등 국내외 혼란이 겹치면서 점차 한계에 부딪혔습니다.
신돈의 급진적 인사 쇄신과 권력 집중은 오히려 귀족·관료층의 불만을 키웠고, 신돈 개인의 도덕성·정치력에 대한 비판도 제기되었습니다.


4. 권문세족의 반발과 개혁의 좌절

신돈의 개혁정책은 권문세족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왔습니다.
신돈은 반역 혐의로 유배된 뒤 1371년 처형당했고, 이후 공민왕도 시해당하면서 개혁은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권문세족이 다시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고, 개혁의 성과는 일부에 그쳤습니다.


5. 역사적 의의와 평가

공민왕과 신돈의 개혁은

  • 고려 후기 권문세족 중심의 사회 구조에 근본적 변화를 시도한 진취적 실험이었으며,
  • 이후 조선 건국과 신분제 개혁, 사대부 사회의 성장에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했습니다.

하지만

  • 사회적 기반의 취약,
  • 기득권 세력의 강고한 저항,
  • 국내외 혼란 등으로 인해
    개혁은 완성되지 못하고 한계에 부딪혔습니다.

참고문헌

  • 우리역사넷, 「공민왕의 개혁 정치와 신진 사대부의 성장」, 「공민왕의 개혁 정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신돈」, 「공민왕」
  • 위키백과, 「신돈」
  • 김영수, 「신돈(2) 개혁정책은 왜 실패했나」, 중앙일보
  • 네이버 블로그, 「공민왕의 개혁정책과 신돈 / 사료와 해설」
  • 『고려사』 등 관련 사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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