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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하인드 한국사 #38 :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백두산에서 제작했다는 오해

J.J.(제이제이) 2025. 5. 22. 20:15

비하인드 한국사 #38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백두산에서 제작했다는 오해


1. 대동여지도, 조선 후기 지리학의 결정체

1861년,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자 지리학자인 고산자(古山子) 김정호는 한반도 전역을 아우르는 대형 지도,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를 완성했습니다.
이 지도는 방대한 현지 답사와 기존 지리 자료, 그리고 김정호의 집념이 어우러진 결과물로, 근대적 측량 이전 한반도에서 가장 정확한 지도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대동여지도는 22첩 1책의 절첩식(접이식) 지도첩으로, 남북을 22층, 동서를 19판으로 나누었고, 약 1:216,000의 축척으로 전국의 산맥, 하천, 도로, 읍치, 봉수, 역참, 창고, 목장 등 1만 1천여 개의 지명을 수록했습니다.


2. 김정호와 대동여지도, 그리고 ‘백두산 제작설’의 유래

대동여지도를 둘러싼 오해 중 가장 널리 퍼진 이야기가 바로 “김정호가 백두산에 올라가 대동여지도를 제작했다”는 설입니다.
이 오해는 20세기 이후 교과서, 위인전, 대중문화에서 반복적으로 언급되며, ‘고산자 김정호’라는 별명과 함께 그의 집념과 애국심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일화처럼 자리 잡았습니다.

오해의 시작

  • 김정호가 실제로 전국을 답사하며 지도를 만들었다는 사실은 맞지만, “백두산 정상에서 지도를 그렸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 이 오해는 1970~80년대 위인전, 어린이 잡지, 교과서 등에서 “김정호가 백두산에 올라 한반도를 내려다보며 지도를 그렸다”는 식의 각색된 이야기가 반복되면서 확산됐습니다.
  • 일부는 “백두산 천지에 올라 한반도를 한눈에 내려다보고 대동여지도를 완성했다”는 식의 환상적 서술까지 등장했습니다.

3. 실제 대동여지도 제작 과정

1) 방대한 현지 답사

김정호는 한반도 전역을 직접 답사하며 산맥, 하천, 도로, 읍치, 봉수, 역참 등 지리정보를 수집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백두산 정상까지 올랐다는 구체적 사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교통과 치안이 불안정했던 19세기 조선에서 백두산까지 오르기는 매우 어려웠고, 실제로 김정호는 전국 각지의 기존 지리서, 관찬 지도, 민간 자료, 그리고 자신이 직접 답사한 기록을 종합해 지도를 제작했습니다.

2) 기존 지도와 자료의 활용

김정호는 《청구도》, 《동여도》 등 자신이 이전에 만든 지도와, 각 도의 관찬 지도, 《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등 방대한 지리자료를 참고했습니다.
특히 《동여도》는 대동여지도의 전신으로, 김정호가 전국을 순회하며 직접 제작한 필사본 지도입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방대한 지명과 지리정보를 비교·분석해, 오류를 바로잡고 새로운 정보를 추가했습니다.

3) 목판본 제작

대동여지도는 1861년(철종 12) 목판본으로 간행되었고, 1864년 재간행되었습니다.
목판 인쇄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지도를 볼 수 있게 했고, 이는 조선 후기 사회에 지리정보가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4. ‘백두산 제작설’의 허구와 진실

왜 이런 오해가 생겼을까?

  • 김정호의 집념과 애국심을 강조하려는 의도에서, “백두산까지 올라가 지도를 그렸다”는 식의 각색이 만들어졌습니다.
  •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산이자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은 상징적 의미가 크기 때문에, ‘고산자’라는 별명과 맞물려 신화적 서사가 덧붙여졌습니다.
  • 실제로 대동여지도에는 백두산과 천지, 그리고 주변 산맥이 정밀하게 묘사되어 있어, “백두산에서 내려다본 것처럼” 보인다는 인상도 한몫했습니다.

사료와 연구의 결론

  • 김정호가 백두산에 올라가 대동여지도를 제작했다는 사료는 없습니다.
  • 대동여지도는 방대한 현지 답사, 기존 지도와 자료, 그리고 김정호의 분석과 집념이 어우러진 결과물입니다.
  • 대동여지도는 한양(서울)에서 제작되었으며, 일부 목판은 현재 서울역사박물관, 성신여대박물관, 규장각 등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5. 김정호와 대동여지도, 진짜 위대함은 어디에?

1) 지리정보의 집대성

대동여지도는 근대 이전 한반도에서 제작된 지도 중 가장 정확하고 체계적인 지도입니다.
축척, 거리, 지명, 도로망, 산맥, 하천, 봉수, 역참 등 방대한 정보를 체계적으로 담아냈습니다.

2) 실사와 분석의 결합

김정호는 직접 현지 답사를 통해 실측 정보를 얻었고, 기존 지도와 지리서의 정보를 비교·분석해 오류를 바로잡았습니다.
이는 단순한 모방이나 필사가 아니라, 과학적 분석과 창의적 집대성의 결과였습니다.

3) 대중적 보급과 실용성

목판본으로 간행된 대동여지도는 조선 사회에 지리정보를 널리 보급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관료, 상인, 민간인 등 다양한 계층이 지도를 활용할 수 있었고, 이는 조선 후기 사회의 정보화와 실학적 발전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6. 대동여지도에 담긴 백두산의 의미

대동여지도에는 백두산과 천지, 그리고 주변 산맥과 하천이 매우 정밀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백두산은 조선 후기에 민족의 영산으로서 상징적 의미가 컸고, 김정호 역시 이 산을 매우 정성스럽게 그려 넣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백두산 현지 답사만의 결과가 아니라, 기존 지리자료, 관찬 지도, 민간 정보, 그리고 김정호의 분석이 어우러진 결과입니다.


7. 김정호와 대동여지도를 둘러싼 또 다른 오해들

  • 옥사(獄死)설: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제작하다가 정부의 탄압을 받아 옥사했다는 설도 있으나, 공식 사료로 확인된 바 없습니다.
  • 판목 소각설: 일제강점기에 대동여지도 목판이 모두 소각되었다는 설도 있으나, 실제로는 일부 목판이 국립중앙박물관, 숭실대박물관 등에 남아 있습니다.
  • ‘지도광’ 신화: 김정호가 오직 지도를 위해 평생을 바쳤다는 신화적 서술은 사실이지만, 그 역시 가족과 제자, 후원자들과 함께 지도 제작에 임했습니다.

8. 결론: 신화가 아닌, 집념과 실학의 산물

김정호가 백두산에서 대동여지도를 제작했다는 오해는

  • 그의 집념과 애국심을 상징적으로 각색한 이야기일 뿐,
  • 실제로는 방대한 현지 답사, 자료 분석, 그리고 실학적 연구의 결과입니다.

대동여지도는 신화가 아닌, 집요한 실사와 분석, 그리고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집단적 노력의 산물입니다.
김정호의 진짜 위대함은, 백두산에서 한반도를 내려다본 상상력보다,

  • 전국을 발로 누비며 자료를 모으고,
  • 기존 지리정보를 분석하고,
  • 목판 인쇄라는 기술을 활용해 지도를 대중화한 실천적 집념에 있습니다.

참고 및 인용 문헌

  • 위키백과, 「대동여지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대동여지도」
  • 우리역사넷, 「김정호」
  • 박물관신문, 「김정호와 대동여지도」
  • 서울역사박물관, 「대동여지도, 누구나 다 알지만 누구도 다는 알지 못하는 명품」
  • 문화재청, 「보물 대동여지도(1985)」
  • 디지털당진문화대전, 「대동여지도」
  • 네이버 블로그, 「대동여지도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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