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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 대원군은 조선의 문을 굳게 닫는 쇄국 정책을 펼치며 외세의 침투를 강력히 차단했습니다. 하지만 서양 세력은 무력으로 조선의 문을 열려 했고, 결국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가 일어났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이 두 사건의 배경과 결과를 기출 사료 중심으로 정리합니다.
📘 기출 사료 분석 시리즈 65
병인양요·신미양요 – 쇄국의 벽을 넘은 서양 세력
📜 기출 사료 발췌
“서양 오랑캐들이 우리 땅에 들어와 성직자를 죽이고, 양민을 괴롭히니 이를 물리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 척화비를 세우고, 서양과 통상하지 않기로 한다.”
🧠 해석 및 의미
이 사료는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의 배경과 흥선 대원군의 대응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1866년 병인박해를 이유로 프랑스가 강화도를 침략했고,
1871년에는 미국이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구실로 신미양요를 일으켰습니다.
흥선 대원군은 두 사건 모두 군사적 저항으로 맞섰고,
이후 전국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워 서양과의 통상을 전면 거부합니다.
이는 조선의 문을 더욱 굳게 닫는 결과를 낳았고,
결국 훗날 강제 개항으로 이어지는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 기출문제 예시
[문제] 다음 사료는 어떤 사건과 관련이 있는가?
“서양 오랑캐들이 우리 땅에 들어와 성직자를 죽이고, 양민을 괴롭히니… 척화비를 세우고 통상하지 않기로 한다.”
① 임오군란
② 병인양요·신미양요
③ 강화도조약
④ 갑신정변
➡️ 정답: ② 병인양요·신미양요
💡 확장 개념 정리
구분 병인양요 (1866) 신미양요 (1871)
배경 | 병인박해(천주교 탄압) | 제너럴셔먼호 사건 |
침입국 | 프랑스 | 미국 |
침입 장소 | 강화도 | 강화도(초지진·광성보) |
조선 대응 | 정족산성 저항 (문수산성, 양헌수 장군) | 어재연 장군의 광성보 항전 |
결과 | 서양 세력 일시 퇴각 → 척화비 건립 | 무력 저항 지속 → 쇄국 의지 강화 |
🧩 이와 함께 기억할 개념들
- 척화비 내용: “서양과 화친하면 나라가 망한다.”
- 대원군의 폐쇄정책 강화 → 이후 개항파·통상론자와 충돌
- 서양의 무력시위 → 개항 압박 수단으로 반복 사용
- 불평등 조약의 전조 → 강화도조약(1876)의 배경 형성
✍️ 정리 한 줄 요약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는 조선이 쇄국 정책을 고수하면서 서양 열강과 충돌한 대표적인 사건으로, 대원군은 무력 저항과 척화비 건립으로 외세를 강력히 배척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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