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긴 조선은 점차 일본의 식민 통치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 암울한 상황 속에서, 일부 지식인들은 무력 투쟁이 아닌 '교육과 계몽'을 통해 민족의 독립 역량을 키우는 길을 선택합니다. 이를 ‘애국계몽운동’이라 하며, 그 대표 조직이 바로 ‘신민회’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애국계몽운동과 신민회의 활동 내용을 기출 사료와 함께 살펴봅니다.
📘 기출 사료 분석 시리즈 77
애국계몽운동과 신민회 – 교육으로 민족을 일으키다
📜 기출 사료 발췌
“국민의 자각 없이는 자주독립이 없고, 독립을 이루기 위해서는 국민의 실력 양성이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는 학교를 세우고, 산업을 진흥시켜 민족의 힘을 기르려 한다.”
🧠 해석 및 의미
이 사료는 신민회와 애국계몽운동의 사상과 실천 노선을 담고 있습니다.
무장 투쟁이 제한된 상황에서, 지식인 중심의 애국계몽운동 세력은
- 국민 교육,
- 언론 활동,
- 산업 진흥을 통해
민족 자강(自强)의 기반을 쌓으려 했습니다.
1907년 결성된 신민회는 비밀결사이자 애국계몽운동의 구심점으로,
- 대성학교, 오산학교 설립,
- 대한매일신보 후원,
- 국채보상운동 지원,
- 해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신흥무관학교) 등
다방면에서 독립 역량을 키우려 했습니다.
📝 기출문제 예시
[문제] 다음 사료는 어떤 단체 또는 운동의 사상을 보여주는가?
“국민의 자각 없이는 자주독립이 없고, 우리는 학교를 세우고 산업을 진흥시켜…”
① 의열단
② 신민회
③ 동학농민군
④ 독립협회
➡️ 정답: ② 신민회
💡 확장 개념 정리
구분 내용
애국계몽운동 | 교육·언론·산업을 통한 민족 역량 강화 운동 (1896~1910) |
대표 인물 | 안창호, 이승훈, 양기탁, 신채호 등 |
신민회 설립 | 1907년, 평양 → 전국으로 확산 |
주요 활동 | 학교 설립, 언론 발행, 국채보상운동 지원, 독립기지 건설 |
해체 | 1911년 ‘105인 사건’으로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 |
🧩 이와 함께 기억할 개념들
- 대한매일신보: 양기탁과 영국인 베델이 창간한 항일 언론
- 국채보상운동(1907): 대구에서 시작 → 일본 차관 상환을 위한 민간운동
- 신흥무관학교: 만주 삼원보에 설립, 무장 독립운동가 양성소
- 105인 사건: 데라우치 총독 암살 미수 사건 조작 → 신민회 해산
✍️ 정리 한 줄 요약
신민회를 중심으로 한 애국계몽운동은 무력보다는 교육, 산업, 언론을 통한 민족 자강과 독립 역량 강화를 추구한 근대적 민족운동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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