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의 어른들 ④
천노엘 신부 - 하늘나라로 떠난, 땅끝까지 사랑을 나눈 사람
2025년 6월 1일, 한 사람이 조용히 하늘나라로 떠났습니다. 천노엘 신부, 본명 노엘 오닐(Noel O'Neill). 그는 아일랜드 태생의 성직자로, 1957년 한국 땅을 밟은 후 67년간 우리나라의 가장 약한 이웃들과 함께한 분입니다. 그의 나이, 93세였습니다.
그는 대단히 말수가 적은 이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의 침묵은 무관심이 아닌, 깊은 경청의 시간이었고, 그의 한 마디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따뜻한 울림이었습니다.
■ 아일랜드에서 온 젊은 사제, 한국에 뿌리내리다
노엘 오닐 신부는 1931년 아일랜드 남부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신앙심이 깊었던 그는 성골롬반 외방선교회에 입회해 신학을 공부하고, 1956년 사제로 서품을 받았습니다. 그의 눈에 한국은 특별한 땅이었습니다. 한국전쟁 직후, 참혹한 전쟁의 상흔이 남아있던 한반도의 소식은 그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고, "가장 도움이 필요한 곳에 가고 싶다"는 마음으로 1957년, 스물여섯의 나이에 인천항에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서울에서 2년간 한국어를 익히며 한국 문화와 풍습을 배운 그는, 1958년 전남 장성성당 보좌신부로 첫 사목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광주 서교동본당, 원동본당, 제주중앙본당, 북동본당, 농성동본당 등 여러 지역에서 주임신부로 활동하며 신앙과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 무등갱생원에서의 만남, 삶을 바꾼 계기
천 신부의 인생을 바꾼 결정적 순간은 광주 북동본당 주임 시절, 무등갱생원에서 봉사활동을 하면서 찾아왔습니다. 무등갱생원은 알코올중독자, 노인, 고아, 발달장애인 등 600여 명이 모여 살던 대형 수용시설이었습니다. 이곳에서 연고도 없이 세상을 떠난 한 지적장애인 소녀의 죽음은 천 신부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그는 "이 아이들이 가족의 품처럼 따뜻한 곳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돕고 싶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 장애인 인권의 새로운 길 – 그룹홈의 시작
1981년, 천 신부는 안식년을 맞아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 선진국의 장애인 복지 현장을 직접 방문합니다. 그곳에서 장애인들이 지역사회에서 비장애인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모습을 목격한 그는 “장애인 거주시설은 지역사회에 가까울수록, 작을수록 더 아름답다”는 신념을 갖게 됩니다.
이 신념을 바탕으로, 1981년 광주 남구 월산동의 작은 주택 두 채를 빌려 국내 최초의 ‘그룹홈’(가족형 거주시설)을 시작합니다. 지적장애 여성 1명과 봉사자 2명이 함께 생활하며, 장애인도 지역사회에서 이웃과 어울려 살아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룹홈의 도입은 당시 ‘장애인은 대형시설에 격리돼 살아야 한다’는 사회적 편견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일이었습니다. 천 신부는 “발달장애인 친구들이 동네 목욕탕, 주변 시장, 근처 마트에서 보인다면 이상한가요?”라며, 장애인도 지역사회 일원으로 살아갈 권리가 있음을 강조했습니다.
■ 엠마우스 복지관과 무지개공동회 – 자립의 길을 열다
1985년, 천 신부는 장애인들의 경제적 자립을 돕기 위해 엠마우스복지관을 설립합니다. 이곳에서는 직업훈련과 사회적응 교육이 이뤄졌고, 장애인들이 스스로 일하며 자립할 수 있도록 다양한 지원이 제공됐습니다.
1993년에는 사회복지법인 무지개공동회를 설립해, 지적장애 및 자폐스펙트럼 장애인들의 자활을 적극 지원했습니다. 이 두 기관은 광주와 전남 지역 장애인 복지의 중추적 역할을 하며, 수많은 장애인과 가족들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습니다.
천 신부가 세운 그룹홈 모델은 전국적으로 확산돼, 2023년 기준 전국 746곳, 2,800여 명이 이용하는 규모로 성장했습니다. 그는 “장애인은 보호받는 대상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이웃”이라는 철학을 실천하며, 인권 보호와 인식 개선에 앞장섰습니다.
■ 지역사회와 함께한 일상, 그리고 변화
천 신부가 만든 그룹홈과 복지관, 공동회는 단순히 장애인을 위한 시설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어울리는 ‘포용의 마을’을 꿈꿨습니다. 실제로 광주의 한 단지 내에서는 장애인들이 목욕탕, 시장, 마트 등 지역사회 곳곳을 자유롭게 오가지만, 주민 누구도 불평하지 않습니다. 오랜 시간 천 신부와 동료들이 지역사회와 신뢰를 쌓으며,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는 문화를 만든 결과였습니다.
■ 사회적 인정과 수상, 그리고 대한민국 시민
천 신부의 헌신은 사회적으로도 크게 인정받았습니다. 1991년 광주시 최초의 명예시민으로 선정됐고, 1999년에는 엠마우스복지관이 ‘한국장애인인권상’ 단체부문 제1대 수상자로 선정됐습니다. 2016년에는 법무부로부터 특별공로자 자격으로 대한민국 국적을 부여받았습니다.
그는 “한국이 제2의 고향”이라며, 늘 한국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만든 복지 시스템이 자신 없이도 잘 운영될 수 있도록, 후배들에게 책임과 역할을 점차 넘겨주었습니다.
■ 아일랜드로의 귀향 – 마지막 선택의 이유
2023년 7월, 천노엘 신부는 고령과 건강 악화로 인해 오랜 사목과 봉사활동을 마무리하고 고향 아일랜드로 돌아갔습니다. 90세가 넘은 천 신부는 지병이 악화되어 더 이상 현장에서 활동을 지속하기 어려웠고, 주변 동료들과 가족, 복지관 관계자들도 그의 건강과 안위를 위해 귀국을 권유했습니다.
천 신부는 “내 몸은 고향 아일랜드로 돌아가지만, 마음은 늘 한국에 남아 있을 것”이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실제로 그는 일부 유해를 한국에 안치해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광주대교구는 그의 뜻을 존중해 장례 절차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 선종, 그리고 남겨진 유산
2025년 6월 1일 오전 8시 30분(현지시간), 천 신부는 아일랜드에서 조용히 생을 마감했습니다. 향년 93세. 그의 선종 소식에 광주대교구와 전국의 장애인 가족, 시민들은 깊은 애도를 표했습니다. 광주대교구는 대성당에 분향소를 마련하고 조문을 받았으며, 추모 미사와 장례 미사가 이어졌습니다.
천 신부가 남긴 유산은 단순한 복지시설이 아닙니다. 그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살아가는 ‘포용의 사회’, 그리고 “서두르지 말고 기다려야 한다, 항상 인내하고 사랑해달라”는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 천노엘 신부를 기억하며
천노엘 신부는 67년간 한국에서 장애인 복지와 인권을 위해 헌신하며, 수많은 이들의 삶을 변화시켰습니다. 그의 삶은 ‘우리시대의 어른’이란 말에 가장 어울리는 본보기입니다. 그는 우리에게 “함께 살아가는 세상, 기다려주는 사회”의 가치를 일깨워주었습니다.
“장애인 거주시설은 지역사회에 가까울수록, 작을수록 더 아름답다.”
“발달장애인 친구들과 함께 가려면 서두르지 말고 기다려야 한다. 항상 인내하고 사랑해달라.”
천 신부의 마지막 귀향은 단순한 이별이 아니라, 그가 한국에 남긴 사랑과 헌신이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임을 보여줍니다. 우리 모두가 그의 뜻을 이어받아, 더 따뜻하고 포용적인 사회를 만들어가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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